최근 포토로그


무지개 문어 2020:기록

문어에 감정이입이 될 때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생뚱맞으려나.

명절이나 제사 준비를 하면서 나름 가장 신경써서 준비하는 제수용 음식 중 하나가 문어이다보니, 본의 아니게 문어의 최후를 많이 목격하곤 한다.
(부산에선 어류가 무척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싱싱한 재료라야 맛이 있으므로 굳이 산 문어를 선호한다.)

문어의 고통을 사람의 마음으로 보다 보면 마음이 영 불편하다.

문어는 바다생물 중에서도 지능이 높고 촉각이 예민하다고 하는데 그런 고등생물에 대한 처우로 걸맞지않게, 시장 바닥에 내 팽겨쳐지며 최후를 맞는 것이다.
(문어는 힘이세서 바닥에 내동댕이 쳐서 기선제압 하지않으면 손질할 수가 없다. 내장과 먹물을 제거해도 계속 꿈틀대므로 냉동실에 넣어야 잠잠해진다.)

종종 내 스스로를 촉수가 예민한 문어와 동일시해보곤 한다. 시장바닥의 문어에 연민의 정을 느낀이후로 어느새 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촉각이 그리 예민한 편은 아니지만
평균보다 낫다고 자평하는 미적감각이라든지 소소하게 잔재미나 자잘한 아름다움을 잘 발굴하는 '감각'도 있으니까
문어와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잖냐며
바득바득 문어와 닮고 싶어하는 것이다.

현실분석의 눈과 이성적 태도로 세상을 보기 보단, 감촉과 감각에 의지해 세상을 본다할까. 아무튼 그런 경향이 나에겐 있으니까 나의 더듬이 혹은 촉수는 문어의 것처럼 부피가 꽤나 큰 편일거다.

위장을 곧 잘하는 문어는 주변의 색에 흡사하게 동화하는데, 그것도 주변의 분위기나 상대의 마음을 잘 읽는 내 모습과 겹친다.

상상 속에서 문어에게 한가지 주고싶은 선물은 무지개다. 아름다운 무지개 빛을 만나 온 몸이 무지개빛이 되는 문어의 이미지가 아주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나는 일상에서 예쁘고 귀한 것을 참 많이도 알아보는데, 함께 공유할 방법도 상대도 많지않다.
길가에 숲에 그림에 글에 음악에 누군가의 목소리에 마음에 맵시에 유머러스한 재치에 오래된 물건에 멋진패턴에 싱그런 음식맛에 언제고 탄복하며 동화될 때
나는 온통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마치 무지개 문어와 같다, 라고 생각한다.

흰머리 아무 글


나는 흰머리가 싫지 않다.

외할머니는 아흔 나이로 돌아 가실 때까지 거의 검은 머리셨고
울 엄마도 일흔 넘도록 자연스런 갈색머리에
머리결도 고우신 편인데

나는 어찌 마흔 넘으면서 흰머리가 여기 저기 난다.  
근데 그렇게 싫진 않다.
친구나 가족들이 염색안하냐고들 하는 게 불편할 뿐.

길에서 완전한 백발에 보라색 터치를 살짝 입힌 멋진 할머니를 봤었다. 자태가 너무 고우셔서 일부러 말을 걸어 보았었다.
보라색 코팅은 머리 끝에 살짝 묻어 있었기 때문에 흰머리가 오히려 더 강조되어 보였는데, 백발이 그렇게 예쁘고 우아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프고 힘들어서 머리에 신경을 쓰지못한 나머지 흰머리로 지내시는 분들이나, 염색을 하려도 하면 안되는 분들도 있겠지. 그러나 그대로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째서인지 온통 흰머리인 경우는 인상이 한결 편안해 보이기 때문이다

나도 흰머리가 생길거면 어중되게 군데군데 나지말고 확 하얀 머리가 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쁜 백발을 갖게 되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다고들 하더라.

얼룩덜룩한 회색 머리는 확실히 좀 덜 예쁠 것이다.
그래도 그런 머리라도 뭐 어떤가. 강경화 장관이나 배우 문숙 처럼 회색 머리가 오히려 연륜과 자신감을 표현하는 새로운 멋이 되기도 하지 않나.
 
돌아가신지 벌써 오래긴 하지만, 우리 할머니의 머리도 그랬다. 얼룩덜룩한 회색이었다.

할머니는 이른 아침이면, 정갈한 손매로 신문지를 마루바닥에 펼쳐놓고 빗꾸러미를 곁에 풀어놓았다.
신문지는 그위에 머리를 드리우기 위한 용도였다. 
번질해진 참빗으로 흰머리가 반쯤섞인 회색머리채를 비스듬히 고개숙여 빗었다.
할머니는 원래 말씀이 많은 분은 아니셨지만, 머리 빗는 아침 의식을 행할 때는 더 말을 아끼셨다.
이게 뭐예요, 저건 왜 저래요... 손녀가 물어도 그저 조용히 짧게 대답하셨는데,
어찌보면 머리 빗는 아침 습관은, 지금으로 치면 조용히 원두를 갈아 내려마시는 행위처럼 고요히 내면에 몰두하는 일일 터인데
손녀가 훼방을 놓았던 셈이다.

손바닥에 동백혹은 아주까리 기름을 발라, 머리결을 쓰다듬고는
흐트러짐 없이 뒤에서 고무를 감아 묶는다.
그리고 숯은 적지만 긴머리채를 솜씨좋게 휘휘감아 순식간에 둥그런 모습으로 만들었는데
내가 봤을 때 그 순간이 가장 멋졌던 것 같다.
신문을 펼치고 머리 빗는 것도 정돈된 동작이라 기억에 남지만, 빠르게 머리를 둘둘 감는 동작은 특히 우아한 긴장감이 있어서 '하이라이트'로 기억된다.

머리를 뒤통수에 얹어 은비녀를 꽂고
뒷정리는 시작보다 싱겁게 후다닥 마무리 하셨는데
때로는 비녀의 착장이 온전하게 되지 않아 몇 번 꽂았다 뺐다 한 것도 보았다.
그 구경도 괜찮았다. 연구거리가 되었다.

몇 번 밖에 안 본 그 장면이 멋진 그림처럼 남아있는 것이 신기하다.
그 장면은 내가 흰머리에 대해 반감이 없는 심리적 이유가 되는 것 같다.

나는 만날 때 마다 내 흰머리를 뽑아주시려는
친정 엄마의 손을, 웃으며 붙잡는다.












재능낭비 아무 글

잘 듣는다.
상대방이 이야기 할 맛이 나도록 '재미나게' 들을 줄 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를 어려워 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긴 관상이 따로 있는 건지 몰라도
얼굴을 한번 살피고는 편히 이야기들을 꺼내신다.

그렇게
지나가던 여유로운 행인1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가 제 결대로 가다보면 비밀스러워야할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다.
푹 빠져듣다보면 시간도 공간도 잊은 채
출구도 입구도 없이,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이야기 속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흘러가도록, 다른 이야기 길을 터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 이야기를 시작할 틈만 만들면
스스로 이야기 길을 만들어 내는 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었다. 길가던 행인 1,2,3... 친구, 가족, 가리지 않았다.
예전엔 그랬다.
그게 정확히 언제쯤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언제부터인지 나는
'온 마음으로 듣는 일'을 중단했다.

그렇게 만든 건
나의 마음 속을 스스로 들여다 보기 시작한 것과 관계가 있다.
*
*
*
긴 얘기를 생략하고,
그렇게 나는,
내가 제일 잘 하던 일을 그만두고
어쩌다 한 번씩 발동되려고 하는 '마음을 다 해 듣기'능력이 꿈틀꿈틀 거려도
애써 다독이며 그 욕구를 떨쳐낸다.

참 우습다.
고작 내가 잘 하는 일이 듣는 일이라니.
그러고도 그 걸 그만두어야 하고
잘 하지 못하는 일들, 혹은 덜 잘하는 일들을 붙들고 열심이라니.

*******************************
★ ☆
문득 쓰기연습 겸 이런 저런 넉두리를 풀어 보고 싶었다.
아무 제목 ( '재능낭비'라든지) 을 지정해 놓고
그때 그때 생각나는 것을 적어볼까 한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